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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재하는 것은 것은
    모두 향기가 있다”

    조향사 노인호

    • 김민선
    • 사진 김준후
  • 존재하는 것은 모두 향기가 있다. 그림에도 말이다. 그림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향기로 미술을 향유할 수 있다고 전하는 이가 있다. 명화를 분석하고 작품 속 상황을 상상하면 작가가 의도했던 상황, 작품 속 주인공의 실제 느낌 등의 ‘작품 감성’을 향으로 전할 수 있다는 노인호 조향사를 만났다.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알프레드 시슬레의 <눈 내린 루브시엔느>
“그림은 색이나 풍경을, 감성은 향을 담는다”

“겨울의 향을 물으시니 인상주의 화가 알프레드 시슬레의 <눈 내린 루브시엔느>가 생각났어요. 눈이 내리는 상태와 그 때의 대기, 눈이 살포시 쌓인 모습이 역설적이게도 포근해 보였거든요. 새하얗고 포근한 눈이 덮인 걸 향료로 표현하자면 머스크(사향)와 아이리스(붓꽃), 베이비파우더 향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노인호 조향사는 향수를 만들고 향이 담긴 예술작품을 소개하는 ‘퍼퓨머’다. 그림에 향기를 입히는 조향사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작품을 볼 때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 이라던가 작품의 배경 혹은 작가의 이야기를 향과 매칭시켜 향수와 미술이 만나는 새로운 예술을 경험하게 한다. 예를 들어 빈센트 반 고흐의 <아몬드 블라썸>은 고흐가 갓 태어난 조카를 위해 환희와 기쁨을 표현한 작품으로, 가드니아(치자꽃)와 화이트 로즈(장미향)의 포근함과 사랑이 느낄 수 있는 향으로 조향해 작품을 새로운 관점에서 관람하도록 돕는다.
“예술 작품의 향을 조향할 때는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요. 직관적으로 보이는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향과 작품과 작가의 이야기(배경)에서 비롯된 향 말입니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라는 작품은 수련이 그림의 전부이기 때문에 수련의 향을 느낄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향으로 조향해야 합니다.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뜨의 무도회>는 향기가 느껴질만 한 그림의 요소는 없지만 삶의 기쁨이 넘치는 그림 속 인물들의 미소에서 영감을 받아 감탄의 향기, 행복의 향기를 느낄 수 있게끔 시트러스(감귤류 향조)를 선택하기도 했죠.”
무도회에 퍼지는 유쾌함이 향기로 다시 태어나듯 상상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가 노인호 조향사를 통해 향으로 전해져 마치 현실, 작품에 숨을 불어넣게 되는 것이다. “향료도 고유의 향을 가진 천연향료와 천연향을 구현하기 위해 화학적으로 합성해서 만든 합성향료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라일락 향은 천연 향료가 없어서 합성향으로 향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요.”

작품이 주는 치유, 예술의 힘

노인호 조향사가 그림에 향기를 입히게 된 데에는 여러 경로가 있었다. 조향을 전공하던 대학생 시절 국내에는 전무했던 향수 전문 매거진 <코 파르팡>을 만들었다. 향수 잡지의 반응이 좋았던 탓에 계간지는 월간지가 되었고, 전국 서점에 판매될 정도로 작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평소 관심이 있던 미술 작품을 해설하는 작품해설가로 변신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작품 해설을 하면서 작품과 연관된 향기를 만들어 관람객에게 전달한 것이 당시 상당한 호응을 이끌어 내게 된다. 향과 화장품관련 전공을 했던 그였지만, 미술 작품을 보는 좋아하던 일이 더해져 재밌게 할 수 있었던 일로 만들어낸 것이다.
“유학생활이 힘들 때 고단하고 지친 마음을 위로 받을 곳이 간절했습니다. 쉬는 날이면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며 위안을 받았어요. 특히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가장 좋아했던 곳이 그 많은 전시실 중에 ‘클로드 모네의 방’ 이었는데요. <수련> 대작이 양옆으로 펼쳐져 있는 공간에 혼자 앉아 있을 때면 유학생활의 고생스러움이 치유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 깨달았어요. ‘아, 이것이 바로 예술의 힘이구나!’ 라고요.”

나도 모르게 여러 가지 감각들이 총동원 되어 작품을 감상하지요. 후각은 음악처럼 시간이 걸리지도 않고, 무용처럼 피날레를 기다리지 않아도 다가오는 임펙트가 있어요.

클로드 모네 <수련>
“후각만큼 감성적이고 본능적인 감각은 없다”

미술관에서 힘을 얻던 그가 어느 날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수련>이라는 작품 앞에서, 바로 그림에서 향기를 느낀 것이다. 그림 속 수련에서 화려하지 않지만 잔잔하면서도 투명한 그 내음을 느낀 뒤, 수련의 향을 조향했고, 이후에는 그의 작품해설마다 관람객에게 시향지를 건넸다.
“우리는 여지껏 눈으로만 작품을 감상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단 한번도 눈으로만 감상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여러 가지 감각들이 총동원 되어 작품을 감상하지요. 후각은 음악처럼 시간이 걸리지도 않고, 무용처럼 피날레를 기다리지 않아도 다가오는 임펙트가 있어요. 회화, 조각은 대부분 시각적인데 가장 감성적인 후각의 향이 만나면 전과는 전혀 다른 감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입니다.”
눈으로만 보았던 예술 작품을 후각이라는 다른 감각과 함께 감상하는 것은 조금 더 감성적이고 본능적으로 그림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후각은 감성적이고 본능적인 감각은 없으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강력한 감각이기도 하다. 노인호 조향사는 그래서 향을 ‘조연’으로 표현한다. 그림, 음악 등의 예술작품은 주연으로 주연을 더욱 돋보이게 하면서도 조연의 역할을 확실하게 한다는 것이다.
“향도 결국 음식과 같아서 어울리는 향을 서로 잘 접목시켜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그림과 향을 접목 시킨 그림의 향기처럼 여러 감각이 접목된 공연, 콘서트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향기도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추후에는 진짜 향기의 미술관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는 에드워드 호퍼라는 작가의 작품으로 향기를 만들고 싶고요. 그걸 넘어서서 현대 미술 작가님들과도 협업을 통해 작품 세계를 구현할 예정입니다. 또한, 지금처럼 알고 계신 명화 작품들을 다르게 해석해 예술의 풍부함을 전하며, 많은 이들에게 제가 겪은 그 치유를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