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 그린

콩밭 사이로 익어가는 가족의 계절

강진 푸소(FU-SO) 체험

호텔 수영장도, 화려한 놀이공원도 없다. 그 대신 코끝을 간질이는 풀 냄새와 뜨거운 햇볕 아래 짙어진 흙냄새, 손으로 직접 따는 옥수수와 초록빛 콩밭이 있다. 수도권동부환경본부 신홍섭·대구경북환경본부 김현희 주임 부부와 다섯 살 아들 혁이가 선택한 이번 여름휴가는 ‘촌캉스’다. 평상시 대구와 가평에서 떨어져 지내는 주말부부이니만큼 세 가족이 온전히 함께하는 시간은 더욱 귀하다. 그래서일까. 한가로운 시골의 하루하루가 이들 가족에게는 어느 근사한 여행보다 특별했다.

동백꽃 한 줌, 세 식구의 첫 번째 추억

가족의 올여름 휴가지는 전남 강진군이다. 강진은 ‘강진 푸소(FU-SO·Feeling Up, Stress Off)’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감성은 채우고 스트레스는 덜어낸다’라는 뜻을 담은 강진만의 농촌 체류형 관광 프로그램이다. 농가에 머물며 농촌의 일상과 자연, 먹거리를 경험할 수 있어 요즘 유행하는 ‘촌캉스’라는 말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
대구광역시에서 꼬박 네 시간을 달려온 신홍섭 주임 부부와 아들 혁이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월남사지 근처 ‘하나의 정원’이다. 넓게 깔린 잔디와 낮은 처마의 기와집, 곳곳에 놓인 목공예 작품 구경만으로도 마음이 느긋해진다. 오늘 세 가족이 이곳에서 해볼 체험은 동백꽃과 발효식초를 이용한 ‘생초’ 만들기. 체험에 앞서 주인장이 내놓은 생초 음료를 한 모금 마신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커진다. 너무 맛있다며 이구동성으로 감탄하는 사이, 혁이도 질세라 자기 몫을 하겠다는 듯 야무지게 자리를 잡고 앉는다.
테이블 위에 준비된 재료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수북하게 쌓인 동백꽃이다. 신홍섭 주임이 먼저 어린 동백꽃의 꼭지 부분을 하나하나 떼어낸다. 물과 설탕을 넣은 냄비를 불에 올리는 동안 김현희 주임과 혁이는 나란히 앉아 레몬을 얇게 썬다. 물이 끓어오르면 동백꽃을 넣어 천천히 우리고, 은은한 붉은 빛을 띠는 원액에 3년 이상 발효시킨 식초를 더한다. 모든 과정을 거쳐 새콤달콤한 생초를 완성한다. 오늘 체험의 진짜 주인공은 다섯 살 혁이다. 엄마 손을 꼭 잡고 재료를 조심스레 만지고, 작은 손으로 냄비에 동백꽃을 톡톡 떨어뜨린다. 엄마와 손을 맞잡고 레몬도 함께 썰어본다.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집중하는 모습에 엄마 아빠는 연신 대견한 눈빛을 보내고, 혁이 역시 제 손으로 무언가를 완성했다는 사실에 어깨를 으쓱하며 귀여운 자부심을 드러낸다.

마음껏 뛰어놀아도 괜찮아

체험을 마치고 직접 만든 동백꽃생초를 선물로 받아 든 세 가족은 드디어 숙소인 농가로 향한다. 강진군 병영면 마을 안쪽 깊숙이 자리 잡은 집에 도착하자 부부의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번진다. 화려하게 꾸민 숙소가 아닌, 어린 시절 놀러 가던 할머니 집을 떠올리게 하는 익숙하고 포근한 풍경 때문이다. 널찍한 안마당에는 긴 빨랫줄이 가로질러 걸렸고, 가지런히 널린 빨래에서는 바삭한 햇볕 냄새가 나는 듯하다. 집 뒤로는 울창한 숲이 짙은 녹음을 드리우고, 대문 앞에는 콩과 옥수수가 어른 키를 훌쩍 넘길 만큼 무성하다. 여름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음이 실감 나는 풍경이다.
하지만 혁이의 눈에 들어오는 건 정작 따로 있다. 대문 앞에 놓인 작은 굴착기다. 그림책과 영상, 길가에서만 보던 기계가 눈앞에 나타나 흥분을 감출 길이 없다. 발을 동동 구르며 당장 올라가고 싶어 하는 혁이를 겨우 달래 일단 방부터 둘러본다. 커다란 침대에 빈티지 오락기, 정겨운 나무 테이블과 아담한 주방까지 웬만한 건 다 갖추었다. 도심의 반듯하고 세련된 숙소와는 결이 다르다. 조금 투박해서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시골집 특유의 편안함이 곳곳에 배었다. 방 구경도 잠시, 한여름 무더위도 아이의 성화를 꺾지 못한다. 마침내 아빠에게 안겨 굴착기에 올라탄 혁이는 여기저기 만지느라 정신이 없다. 굴착기 운전석에 직접 앉았다는 사실 하나로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 아빠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떠날 줄 모른다.
신나는 일은 계속된다. 이번에는 아빠의 목말을 타고 콩밭 구경에 나선다. 초록빛 콩밭에 콩꼬투리가 여물고,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옥수수는 알알이 영근 채 여름 햇볕을 머금었다. 아빠와 함께 옥수수를 따는 재미는 영상을 보는 일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고, 제 손으로 따는 모든 순간이 다섯 살 혁이에게는 새로운 놀이다. 평상시라면 좀처럼 듣기 힘든 말도 오늘만큼은 인심 좋게 쏟아진다. “마음껏 뛰어도 돼.” “큰 소리를 내도 괜찮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혁이는 기다렸다는 듯 방과 마당을 종횡무진한다. 폴짝폴짝 하다가 냅다 달리고, 엄마 아빠에게 돌아왔다가 어느새 또 저만치 달아난다. 말 그대로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다. 엄마 아빠도 신이 난 혁이를 굳이 말리지 않는다. 쿵쿵거리는 발소리도,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도 모두 이 집에 잘 어울리는 시골의 소리다. “주중에는 남편은 가평, 저는 대구에 있어 주말부부로 지내다 보니 가족이 함께할 시간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신청했는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현희 주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아빠와 옥수수를 따는 재미는 영상을 보는 일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고, 제 손으로 따는 모든 순간이 새로운 놀이다.

풀 냄새, 흙냄새 가득한 우리 가족의 추억

에어컨을 켠 시원한 방에서 잠시 더위를 식힌 뒤 이번에는 농가에서 키우는 산양을 만나기로 했다. 주인장이 가족을 이끌고 집 뒤편으로 향한다. 웬일로 풀밭은 텅 빈 상태다. “너무 더워서 산양들도 숨었네.” 혁이가 서운한 기색을 보이자, 주인장이 산양을 불러내려 “메에” 소리를 낸다. 그러자 숲속 어디선가 화답하듯 “메에” 하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다. 마치 “움직이기 싫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능청스러운 대답 때문이다.
“산양 먹이로는 이게 좋아요.” 주인장이 작은 밤송이가 주렁주렁 달린 밤나무 가지를 꺾어 건넨다. 혁이가 소중하게 받아 들고는 “메에에” 하고 제법 그럴싸하게 산양을 부른다. 숲속에서 다시 “메에” 화답이 돌아와 또 한 번 와르르 웃음이 터진다. 산양과 아이의 귀여운 대화를 누구보다 즐겁게 지켜본 사람은 아빠 신홍섭 주임이다. 매주 빠짐없이 왕복 여덟 시간을 운전해 가족을 만나러 오고, 만나면 몸으로 실컷 놀아 주는 다정한 아빠지만 시골살이의 경험은 좀처럼 아이에게 선물하기 어려웠던 터다. “아내가 원래 농촌 활동을 좋아해요. 밭에서 뭘 캐고 수확하는 활동이요. 저는 관심이 없다가 아내 덕분에 이런 경험을 하게 됐는데, 아이가 이렇게라도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디에서 오는지 직접 보아서 소중한 기억으로 남겠어요.”
저녁이 되어 시원해지면 산양들이 숲에서 내려올 거라는 주인장의 위로 덕에 혁이는 다시 배시시 미소를 짓는다. 손에는 산양에게 줄 밤나무 가지와 옥수수를 소중히 쥔 채다. 주말부부로 지내는 가족은 주말마다 할 일이 많았다. 육아는 물론이고 집안일에, 친인척의 대소사도 챙긴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어느새 신홍섭 주임이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가족은 다시 다음 주말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세 가족 모두 서두를 이유가 없다. 옥수수를 따다가 쉬어도 되고, 콩밭 앞에서 까치발을 하고 한참을 바라봐도 괜찮다. 무엇보다 혁이가 마음껏 뛰어논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부부가 말한다. “도시에서 멀어지니까 일단 마음이 편해져요. 아이와 외출해서는 보통 키즈카페나 쇼핑몰 같은 곳에 가거든요. 여기서는 풍경도 보고 지나가다 꽃이 있으면 ‘잠깐 볼까’ 하고 멈출 수 있잖아요. 가족에게 온전히 집중하니 정말 좋습니다.”
이날 세 식구가 한 일은 그리 대단한 것이 없다. 동백꽃을 끓여 생초를 만들고, 옥수수를 따고, 콩밭을 누볐을 뿐이다. 촌캉스의 매력은 바로 그 ‘별것 없음’이다.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만 즐거운 여행이 아니라, 그저 세 사람이 같은 곳에서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 충만한 하루. 한낮의 산양은 만나지 못했지만 괜찮다. 그 대신 오늘 세 사람은 서로를 실컷 만났으니 말이다.

여기서는 풍경을 보고 지나가다 꽃이 있으면 ‘잠깐 볼까’ 하고 멈출 수 있어요. 가족에게 온전히 집중하니 정말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