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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라이프

발 구르는 곳에 가 닿는 세계를 만나다

자전거 여행가 박주희

태권도 선수, 항공정비사, 트레이너, 그리고 자전거 타고 세계여행. 도무지 접점이 없어 보이는 일에 도전하며 하나의 선을
그리고 있는 이가 있다. 자전거로 777일간 30개국을 누비며 여행을 한 박주희 씨의 이야기이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책도 쓰고 강연도 다니는
등 예상 가능한 활동을 시작하는가 싶더니 다 접고 글로벌 청년 사업가로서의 꿈을 안고 미얀마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단다.

글. 편집실 / 사진. 김재룡, 박주희

자전거 타고 세계로 달리자

“중학교 3학년 때 다니던 학교가 이사를 가는 바람에 자전거로 통학을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자전거는 저에게 버스나 기차와 똑같은 교통수단의 하나라는 인식이 박힌 것 같아요. 그리고 대학 시절에는 제주도에서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자전거 여행의 묘미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어요.” 그렇다고 그때 ‘이런 경험을 쌓아 10년 후에는 자전거로 세계여행을 해야지’라고 생각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미래를 불안해하며 방황하던 시절,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가 했던 크고 작은 경험들이 뜬금없이 떠오르곤 했다. 대학시절 케냐에서 1년간 태권도 자원봉사를 했던 기억까지 떠올린 후 태권도 도복을 여행 가방에 집어넣고 자전거를 굴리며 세계여행을 시작했다. 맨 먼저 도착한 곳은 중국 천진이었다. 중국말을 한마디도 할 줄 모른 채로 중국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초행자의 행운(무엇인가 처음 할 때 뜻하지 않은 운을 얻게 되는 것)까지 겹쳐 주었다. 간절하면 바디랭기지(body language)로도 아주 섬세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바디랭기지라는 만국공통어를 습득한 그는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중국의 남쪽을 지나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6개월쯤 달렸을 때 위기가 찾아왔다고 한다.

내가 왜 달리는 거지?

“태국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내가 왜 달리지’라는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지구에 자전거로 여행할 수 있는 나라가 150개 정도 된다고 하는데 지난 6개월간 겨우 4개 나라를 지나왔더라고요. 어느 세월에 목표한 데까지 갈 수 있을까 덜컥 겁이 났어요. 자신감도 떨어지고 자전가도 타기 싫어지더라고요.”
그때 자전거 여행을 하다가 만난 친구가 ‘잠시 자전거를 내려놓고 배낭여행을 하거나 한곳에 머물러 지내보라’고 조언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전거를 한국으로 부치고 미얀마로 배낭여행을 시작했다.

“배낭여행과 자전거여행이 다르다는 걸 그때 느꼈어요. 배낭여행은 여행지마다 점을 찍는 여행이더라고요. 이를테면, a지역에서 b지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대한 기억이 없어요. 버스 속에서 자고 일어나면 다음 여행지에 도착해 버리니까. 그에 비하면 자전거 여행은 선을 그리는 여행이었어요. 다음 여행지로 이동하는 모든 과정이 선으로 연결되거든요. 다시 간절하게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자전거로는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멈추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멈출 수 있었다. 게다가 연료 걱정도 없다. 온전히 내 힘에서 나온 동력으로 움직이는 탈것이라 더 매력적이었다. 중앙아시아 쪽으로 방향을 잡았을 때는 두려움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고원지대인데다 도로사정이 나빠서 자전거 여행을 하기에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웬만한 자전거 여행자들도 꺼리는 곳이라고 한다. 그곳에서도 ‘일단 한번 시작해보자’는 생각으로 페달을 밟기 시작했는데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어디선가 자전거 여행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SNS로 여행 근황을 알리며 다녔는데 이것을 보고 중국, 태국 등에서 자전거 여행을 하던 사람들이 함께 하겠다며 달려온 것이다.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그렇게 달리다가 777일째 되던 날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여행을 멈추었다. 이제 페달을 멈추어도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 충분히 달렸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까지 달리겠다는 당초의 계획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행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가장 큰 변화를 꼽는다면 무언가를 시도할 때 망설임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도를 할 때는 누구에게나 두려움이 있지요. 두려움이 없을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두렵다고 망설이다 보면 어떤 일도 시도하기 힘들어요. 내가 두드려야 할 문이 콘크리트 벽인지 유리 벽인지 종이 벽인지 직접 두드려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망설이지 말고 일단 한번 두드려보는 겁니다. 다행히 종이 벽이면 찢고 들어가면 되고 콘크리트 벽이면 뒤로 한 발짝 물러나 다른 길을 모색하면 된다는 배짱 같은 게 생겼어요.”
현재는 글로벌 청년 사업가의 길을 모색 중이다. 젊은이들의 해외진출을 돕는 국가사업인 K-MOVE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연수 중이라고 한다. 총 10개월 과정인데 국내에서 4개월간의 연수가 끝나고 나면 미얀마에서 6개월간 현지연수를 받은 후 미얀마 현지에서 당분간 정착할 예정이다. 수십 개국을 누비며 얻은 귀한 경험들을 서랍 속에 넣어 두어야 하는 것이 아깝지 않느냐고 물었다.
“어떤 경험도 쓸모없는 경험은 없는 것 같아요. 여행을 다니면서, 그때는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선이 되는 경험을 수없이 했어요. 저의 좌충우돌 하는 경험들이 또 언젠가는 말도 안되는 시너지를 내는 날이 찾아오리라고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