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여행가, 국제 구호 전문가로 종횡무진 지구를 누비던 한비야는 이제 천천히 걷는 법을 배운다.
그러면서 깨친다. 가진 것에 감사하며 지금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을.
글. 강은주 사진. 정영찬
도보 여행가, 국제 구호 전문가로 종횡무진 지구를 누비던 한비야는 이제 천천히 걷는 법을 배운다.
그러면서 깨친다. 가진 것에 감사하며 지금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을.
글. 강은주 사진. 정영찬
국제 구호를 가르치는 교수로 15년째 이화여자대학교 국제학과 강의를 맡고 있고, 지난해에는 차곡차곡 모아 온 일기와 여행기를 엮어 <그때도 좋았지만, 지금도 좋아!>라는 책을 냈습니다. 최근엔 월드비전 ‘피니시 더 잡(Finish the Job)’ 특임고문이 되어 그동안 마을 단위로 진행한 구호 활동을 국가적 차원으로 확장하고 있어요. 피니시 더 잡은 식수 위생, 기후변화, 빈곤 문제를 뿌리 뽑기 위한 이른바 ‘끝장내기 프로젝트’예요. 현재는 아프리카 잠비아를 비롯한 여러 국가의 식수 및 위생 문제에 집중하는 중입니다. 제가 세 차례 장기 파견 근무를 한 남수단에서는 가축 오물과 기니아충 등으로 오염된 강물을 주민들이 마셔 영아 사망률과 수인성 질환이 심각한 상황이에요. 물 부족 문제는 때때로 유목민과 농민 사이의 생존권 싸움으로 번져 수단의 다르푸르 분쟁 같은 내전의 불씨를 지피기도 합니다. 기후변화가 야기한 물 부족과 위생 문제를 해결해 질병 등을 예방하고, 지역 사회의 평화와 지속 가능한 삶을 이끄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해요.
주민들에게 지속 가능한 해결책이 되려면 사용이 간단하고 편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제안한 방법 중 하나는 자갈·굵은 모래·숯·얇은 천을 이용한 간이 정수통과 정수 약품의 보급이에요. 강 유역에 사는 주민에게 특히 주효한 방식이죠. 대형 정수통에 앞사람이 먼저 부어 놓아 정수된 물을 가져가고, 자신의 강물을 채워 두는 순환 방식을 도입해 바쁜 주민들의 대기 시간을 줄여 효율성을 극대화했지요. 국제 구호 기준으로 인간다운 삶을 위한 물의 최소량은 하루 1인당 7.5리터예요. 아프리카 소외 지역 사람들은 평생 극심한 물 부족을 견디고 살아가야 하지요. 아이들은 물을 긷느라 학교에 가지 못하고, 날마다 같은 길을 오가며 성범죄 위험에 노출됩니다. 근본적 해결을 위해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3년 단위로 수원 관리와 식수 위생 교육을 진행합니다. 식수는 정수해 쓰고, 빗물 저장 시설 등을 지원해 생활용수를 확보함으로써 1인당 7.5리터의 청결한 물을 공급하려 하고요. 집 근처에 깨끗한 수원이 있다면 수인성 질환이 사라질 뿐 아니라 아동·청소년이 교육과 안전을 보장받습니다. 가축, 가정, 마을 전체의 삶이 현저히 나아지는 셈이지요. 그러니 물은 곧 생명이고, 평화의 시작입니다.
올여름 몽골 방문을 앞두고 있습니다. 사막화와 혹한으로 생계를 잃은 목축민이 대거 도시로 이주하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지역이지요. 가을엔 솔로몬제도를 찾을 계획인데, 이곳은 해수면 상승으로 섬이 잠기기 시작한 도서 국가 중 하나예요. 이미 다섯 개 섬이 잠겼고, 바닷물이 역류해 농사를 망친 주민들은 이른바 ‘기후 난민’이 되어 이웃 섬이나 이웃 나라로 이주하는 실정입니다. 사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대륙은 지금 극한의 가뭄과 홍수로 신음하는 중이에요. 최근 1년간 발생한 수해 건수는 지난 10년간 일어난 수해 건수의 총합을 웃돌 만큼 빈도가 잦아졌고 강도 또한 파괴적으로 변했습니다. 기후 재난은 소외 지역 사람들에게 더 가혹하게 찾아와요. 인류의 존망을 좌우하는 기후변화 앞에서 ‘속수무책 피해자’로서의 두려움, ‘간접적 가해자’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세계시민학교 1대 교장으로서 지구집 소식에 늘 귀를 기울여요. 지구가 집이고 80억 인류가 가족이라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를 내 일처럼 알아야겠죠. 그것이 세계시민의 시작입니다. 지금 세계가 직면한 안보·양극화·인구 폭발·도시화·난민 문제 등은 사실상 환경 문제와 기후 위기의 다른 이름이라고 봐도 무방해요. 기후변화는 자원 부족을 일으켜 분쟁을 촉발하거나 가속화하거든요. 예컨대, 산업화에 따른 무분별한 개발로 방글라데시의 맹그로브 숲을 훼손하자 천연 방파제가 사라진 마을은 잦은 홍수와 태풍에 매우 취약해졌습니다. 염수가 유입돼 벼농사를 짓지 못하고 어업이 붕괴되는 등 환경 재난에 무방비로 노출됐지요.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비극은 사슬처럼 연결되고, 여기엔 환경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세계시민으로서 환경 지식을 갖추는 일은 우리 집인 지구와 가족들의 생존을 지키는 필수 교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지만 꾸준히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시작해 보세요. 여행하면서 대륙 내 이동을 할 땐 비행기 대신 육로 교통을 이용하고, 대형 프랜차이즈보다 동네 상점에 가서 지역 사회와 상생하는 방법을 찾는 거죠. 물티슈, 종이컵, 나무젓가락 등 일회용품 대신 손수건, 텀블러, 휴대용 젓가락을 지참하는 일상적 실천도 뿌듯함과 보람을 안깁니다. ‘해 보니 별거 아니네’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지구를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요. 요즘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자연보호는 ‘음식 남기지 않기’예요. 먹을 만큼만 주문하고 남은 음식을 포장하면 환경과 건강을 동시에 지킨답니다.
교수직과 월드비전 고문 역할을 다하는 3년 뒤엔 남은 시간을 힘닿는 데까지 ‘옴팡지게’ 놀면서 재밌게 보낼 계획입니다. 105개국을 여행하고, 25년간 국제 구호 활동하고, 11권의 책을 쓰면서 화려하진 않아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았으니 사회생활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는 네덜란드 사람인 남편과 서로의 나라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오지 여행과 자전거 여행을 즐기며 우리 곁의 이웃을 기꺼이 돕고, 생각과 경험을 글로 남기는 삶에 집중하려 해요.
어느덧 인생의 가을에 접어든 제 삶을 향해 “이것으로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무엇보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우리는 이미 물질적으로 충분한 세상에 살잖아요. 저는 물건을 잘 안 사요. ‘살까 말까 망설일 때는 사지 않는다’가 중요한 원칙이죠. 그래서 강연 때마다 거의 같은 옷을 입어요. 국제 구호 현장을 다니는 제게 사치품은 어울리지도 않고, 지금 이대로도 만족스러우니까요. 실은 제게 이 말을 가르쳐 준 아이가 있어요. 남수단의 한 마을, 일곱 살 미만 아이들을 돌보는 월드비전 어린이집에서 근무하던 시절 일이에요. 공책과 색연필 세트를 나누어 주는데, 눈빛이 초롱초롱한 한 아이가 자신이 받은 선물을 시각장애인 동생에게 만져 보게 하며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얼른 한 세트를 더 건넸더니 글쎄,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미 받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행복의 조건은 가진 것에 감사하며 지금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요.